근대유럽은 14세기 르네상스와 함께 시작되어 18세기 계몽주의를 통해 완성된다. 모든 것을 신 중심으로 사고하고 행동했던 사람들은 이제 세상을 새로운 시각에서 보기 시작했다. 그렇다면 르네상스와 계몽주의는 동물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변화시켰을까? 즉, 하나님이 자신의 형상에 따라 인간을 만들고, 이후 갖가지 동물들을 만들어 이들을 지배하게 했다는 중세의 자연질서관 역시 변화했을까? 그리고 이러한 시각에 따라 행동했던 동물들에 대한 처우는 좀 더 나아졌을까?
불행하게도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귀족 가문에서 잘 대우받던 사냥개나 일부 애완동물을 제외한다면 개나 고양이에 대한 학대는 여전했다. 16세기 영국에는 ‘쳇바퀴 돌리는 개’라는 뜻을 가진 vernepator cur 혹은 키친독(kitchen dog)이라는 개가 존재했다. 이 개는 중산계급의 부엌에서 일하는 사역견(working dog)으로 한 쪽 벽에 부착된 쳇바퀴 속에 들어가 열심히 제자리 달리기를 하면서 쳇바퀴를 돌렸다. 마치 햄스터처럼 말이다. 쳇바퀴는 체인으로 연결되어 벽난로 앞에 놓인 회전 꼬챙이에 연결되었다. 그리고 꼬챙이에는 저녁식사를 위해 준비한 고기가 끼워져 빙글 빙글 돌아간다. 개가 지쳐 속도가 느려질 때면 주인은 얼른 벽난로에서 뜨거운 석탄 조각을 하나 집어 쳇바퀴 안에 넣었다. 그러면 뜨거워 정신을 차리고 다시 사력을 다해 쳇바퀴를 돌렸다.

이 슬프고도 잔인한 광경은 19세기 초까지 영국의 대가족 가정집 부엌에서 저녁마다 반복되었던 일상적인 풍경이었다. 키친독은 주일이면 이 지겹고도 고된 강제노동에서 해방되어 주인과 함께 교회에 가곤 했다. 하지만 주인이 키친독을 교회에 데려간 이유는 따로 있었다. 고된 노동을 했던 개의 안식이 아니라 자신의 발 위에 앉아있게 함으로써 설교를 듣는 동안 꽁꽁 언 발을 녹여주는데 유용했기 때문이다.
비록 점점 줄어들었지만 중세시대처럼 개와 고양이는 여전히 마녀사냥의 대상이었고, 개들은 계속해서 황소나 곰과 싸우면서 희생되었다. 귀족계층 사이에서는 16세기부터 이미 애완견의 개념이 등장했지만, 농민 혹은 중산계급이 키우던 개는 여전히 애완견 혹은 반려견과는 거리가 멀었다. 그들이 기르던 개들은 주로 목동견, 경비견, 키친독과 같은 사역견이었다. 즉, 중산계급 이하 사람들과 개의 관계에는 ‘애완’ 혹은 ‘반려’라는 단어가 의미하는 감정이 이입되어 있지 않았다.
근대 유럽에서 개의 지위는 어떻게 보면 더욱 악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르네상스 이후 신보다는 인간에 대한 관심이 늘어나면서 이제는 동물과 인간을 명확히 구분하려는 경향이 더욱 강해졌기 때문이다. 17세기 초 프랑스 철학자 데카르트는 “영혼이 없는 동물은 ‘자동인형’ 혹은 ‘움직이는 자동기계’에 불과하다”고 주장했다. 키친독은 사람들이 개를 ‘움직이는 자동기계’로 생각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이처럼 중세에서와 마찬가지로 근대에도 역시 개는 인간의 필요에 의해 이용할 수 있는 인형이라는 인식이 강했다. 게다가 18세기에 탄생한 계몽주의는 인간의 이성을 강조했기 때문에 이성을 가지지 못한 동물은 그저 기계장치에 불과하다는 데카르트의 주장에 힘을 실어주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개나 고양이에 대한 애정은 애초에 불가능했는지 모른다. 기계에 애정을 가지는 사람은 없지 않은가?

근대유럽에서도 귀족들과 상류층들은 여전히 애정을 가지고 개들을 잘 대우한 것이 사실이다. 중세시대처럼 그들은 사냥과 같은 고상한 취미를 위해 사냥개들을 잘 관리했다. 귀족 가문의 여인들은 비록 그것이 신분을 과시하기 위한 것이었겠지만 개들을 애완견으로서 잘 대우했다. 그런데 이런 좋은 대우의 이면에는 또 다른 배경이 있는 것 같다. 14세기 성직자였던 토마스 아퀴나스는 인간은 유일한 도덕적 존재이기 때문에 동물을 잘 보살피는 것은 자기 자신의 품성을 함양하는 것이라고 설파했다. 귀족들이 개를 잘 대우했던 것은 오늘날 동물복지론자들이 이야기하는 것처럼 동물도 도덕적 지위를 가진다고 생각했기 때문이 아니라, 어쩌면 도덕적 우월감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 혹은 자신의 도덕적 품성을 주변에 내보이기 위한 수단이었을 수 도 있다. 중세 이후에 그려진 수많은 예술작품에 개가 등장하는 것은 단순히 개의 용맹함이나 충실함을 표현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19세기 독일의 계몽주의 철학자 칸트 조차도 동물의 도덕적 지위에 대한 관심 때문이 아니라, 동물에 대한 자비로운 감정이 인간에 대한 자비로운 감정을 계발해 준다고 설파했다. 즉, 동물을 잘 돌보면 자기 자신이 도덕적 인간이 된다는 것이다. 철저한 신분제 사회 속에서 귀족 등 상류층 사람들은 개를 잘 돌봄으로써 자신들이 하층계급 사람들과는 다르게 도덕적 우월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자 했다는 것은 지나친 확대해석일까?
상류층의 도덕적 자기만족이나 우월의식과는 별개로 근대유럽에서도 개와 고양이는 여전히 학대의 대상이었다. 르네상스 시기에는 그리스-로마시대에 활발했으나 중세시대에는 종교적인 이유로 금지되었던 해부학이 다시 활기를 띠었다. 그러나 사람의 시신 해부에 대한 교회의 여전한 반대 때문에 살아있는 동물해부가 대안으로 제시되었다. 17세기 프랑스의 포르 루아얄(Port Royal) 수도원에서는 데카르트의 신봉자들이 살아있는 동물들을 산 채로 해부했다고 한다. 동물 해부의 대상으로는 원숭이, 말, 쥐뿐만 아니라 개와 고양이도 포함되어 있었음은 물론이다. 동물들은 인간의 지식탐구 욕망의 무기력한 희생양이 되었다.

투견 역시 귀족들 사이에서 지속적으로 유행이었다. 중세 이후 투견은 개가 보다 몸집이 크고 사나운 황소 혹은 곰과 싸우는 형태로 변화되었다. 아마도 흥미의 극대화 때문이었을 것이다. 근대유럽에서도 이러한 형태는 유행되었지만 19세기 중반 이후부터는 점차 줄어들게 되었다. 이는 1835년 영국에서 동물학대 행위가 불법이 되고 곰과 황소의 가격이 비싸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곰이나 황소 대신에 개끼리 싸우는 투견이 대안으로 떠올랐다. 이후 다양한 투견용 개들이 사육되고 미국 등으로 수출되기도 했다고 한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근대 초 유럽의 일부 지역에서는 심각한 기근이 들었을 때 개와 고양이를 먹기도 했다고 한다. 이탈리아에는 “파도바 사람들은 훌륭한 의사이고, 베니치아 사람들은 신사이며, 베로나 사람들은 모두 미쳤고, 비첸자 사람들은 고양이를 먹는다”는 전해 내려오는 노래가 있다. 에드워드 톱셀이라는 사람이 쓴 “네 발 달린 동물의 역사”에서는 스페인과 프랑스 남부에서는 고양이를 먹는 일이 종종 있었다고 적고 있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애견문화가 중산계층 이하로 점차 확대된 것 또한 사실이다. 중산계층에서 애완견이라는 인식은 18세기에 시작되어 19세기에 정착되었다. 근대유럽에서 흥미로운 사실은 예술작품에서 항상 주인과 함께 있는 모습이 그려졌던 이전 시기와는 달리 개가 단독으로 작품의 소재가 되곤 했다는 점이다. 개가 인간과 함께 그려졌을 때는 인간에 대한 헌신이나 복종을 의미하지만, 단독으로 그려졌을 때는 그 자체의 아름다움이나 기억의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즉, 주인이 자신의 반려견의 아름다움을 남기고 싶어 하는 소망이 담겨있다고 할 수 있다. 오늘날 사진관에서 자신의 개나 고양이의 모습을 찍어 소장하려는 마음과 유사한 것이다. 이는 자신의 개를 단순한 물건의 개념이 아니라 반려견의 개념으로 바라보았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중산층의 애견에 대한 인식이 변화되어 애견이 대중적이 됨과 함께 19세기에는 유럽의 애견문화가 비로소 꽃피우기 시작한다. 그것은 1822년 ‘가축동물의 부당한 취급 방지를 위한 법률’ 제정과 함께 시작된다. 영국에서 세계 최초로 제정된 이 법을 시작으로 동물학대 방지를 위한 각종 법률이 제정되었고 유럽 대륙에도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1850년 프랑스에서 그라몬 법이, 1871년 독일에서 동물학대자 처벌법이 제정되었다. 이러한 노력은 20세기에도 이어져 다양한 분야에서 동물보호를 위한 법이 제정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 이러한 동물보호법 역시 계몽주의의 영향으로 볼 수 있다. 비록 동물을 기계론적 관점에서 바라보기는 했지만 계몽주의는 이성에 의거한 도덕적 행위라는 윤리학을 제시했다. ‘인생은 선을 행하기 위해 만들어졌다’고 외치는 칸트의 윤리학은 당시까지 만연했던 동물학대를 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당시의 동물보호법은 비이성적 존재인 동물에 대한 인간의 도덕적 우월적 감정에서 탄생했다고 할 수 있다.

19세기 유럽의 애견문화에서 빠질 수 없는 것은 도그쇼(dog show)의 탄생이다. 도그쇼가 열린다는 것은 애견문화가 점차 비즈니스화 되고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1859년 영국 뉴캐슬에서는 소 박람회 행사 중 최초로 근대적 의미의 도그쇼가 열렸다. 이 도그쇼에는 세터와 포인터 등 사냥개 견종들만 참가했는데, 이후 버밍햄 도그쇼에서는 논스포팅 그룹까지 참가하면서 도그쇼가 확장되었다. 버밍햄 도그쇼협회 주관으로 열린 1860년 도그쇼에는 약 700마리의 견종이 참가하였고, 2만 명 이상의 유료 입장객을 끌어 모을 정도로 인기를 얻었다. 도그쇼의 인기는 애견용 사료 산업의 등장도 가져왔다. 1860년 런던에서는 Spratt's사가 강아지용 비스켓을 선보여 선풍적인 인기를 끌자 유사한 강아지용 사료 제조업자들이 속속 등장했다.

이것은 개를 키우는 것이 일부 귀족층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라 대중적이 되어가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3년 후 열린 도그쇼는 일주일 동안 10만 명의 관객을 끌어 모으며 성대하게 개최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인기를 바탕으로 1873년에는 영국 켄넬클럽이 창설되었다. 한편 Spratt's에서 근무했던 크러프트(Charles Cruft)는 도그쇼의 비즈니스적 잠재력을 확인하고 1878년 파리 엑스포기간 중 도그쇼를 운영한 경험을 바탕으로 1891년에는 자신의 이름을 딴 Cruft Dog Show를 개최하였다. 이 도그쇼에는 영국의 빅토리아 여왕도 자신의 포메라니언 6마리를 출진시키기도 하였다. 기존까지의 도그쇼에는 주로 왕족이나 귀족들이 참가했다면, 크러프트 도그쇼는 중산계급이나 노동계급까지 참가한 최초의 대중적 도그쇼였다. 사망할 때까지 고양이쇼를 포함해 총 45회의 도그쇼를 개최한 크러프트는 도그쇼계의 대부로 불리게 되었다. 오늘날 영국 켄넬클럽이 운영하는 크러프트(Crufts) 도그쇼는 바로 그의 유산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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