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4-28(월)
 
2008년 베이징올림픽 유치 당시 중국 올림픽유치위원회는 경쟁 도시인 파리에 대형 들개가 너무 많이 돌아다녀 위험하다는 점을 부각시켰다. 일부에서는 여전히 식견문화를 가지고 있고 동물복지에 대해서 여전히 관심을 두지 않는 중국이 애견문화의 선진국이라 일컬어지는 프랑스를 상대로 이러한 전략을 펼쳤다는 것이 재미있다. 하지만 중국은 결국 베이징 올림픽을 유치했다. 이러한 전략이 먹혀들었던 것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1억 마리 이상의 반려견을 가진 중국은 실제로 강력한 법을 통해 비교적 안정된 반려견 정책을 유지하고 있다. 1가구 당 1견 원칙을 규정하고, 대도시에서는 35㎝ 이하의 소형견들만 소유할 수 있으며, 강력한 등록제를 통해 통제하고 있는 것이다. 요즘은 사정이 달라졌지만 한 때는 십억 원 이상을 호가하는 차우차우가 날개 돋친 듯 팔리고, 지금도 세계에서 품종이 우수한 비싼 개들은 거의 중국인들이 소유하고 있을 정도로 반려견을 좋아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동물학대 방지법은 여전히 존재하지 않고 매년 1천만 마리 이상이 음식으로 소비된다. 이것을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중국 신화 속의 개
사실 중국은 하나의 애견문화로 설명하기 어려운 나라이다. 56개나 되는 민족으로 이루어진 나라이기 때문에 단일한 애견문화는 존재하지 않는다. 어떤 민족은 개를 숭배하는 반면, 어떤 민족은 여전히 개고기를 즐기며 대대적으로 축제까지 열고 있다. 심지어는 개를 자신들의 선조로 생각하는 민족도 있다. 스스로 곰의 후예라고 생각하는 우리와 별반 차이가 없다. 산악지역에 거주하는 야오족과 서족이 그렇다. 그들이 숭배하는 개는 신화 속의 왕 제곡고신씨의 반려견 판허(Panhu)다. 제곡고신씨는 전쟁에서 승리하는데 공을 세운 자에게 자신의 딸과 결혼시켜 주겠다고 했다. 이에 판허가 나서 적의 장수를 물어 죽여 머리를 가져다 바쳐 전쟁에서 승리하였다. 결국 공주와 결혼해 남쪽 산악지역으로 내려가 대대로 번성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전설을 믿는 야오족과 서족은 판허를 자신들의 왕으로 숭배하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판허 신화가 묘족과 리족에서는 조금 변형되어 나타난다. 왕이 개를 자신의 딸과 결혼시키기를 주저하자 판허가 종 속에 들어가 280일이 지나면 사람이 된다고 말하고 종 속으로 들어갔다. 하지만 왕은 참지 못하고 279일 째에 종을 열어봤기 때문에 완전한 사람이 되지 못하고 몸통만 사람인 반인반견이 되었다는 것이다. 이쯤 되니 이들 지역에서는 당연히 개의 학대나 개고기가 금지되고 있다.


판허신화 그림.jpg▲ 판허신화 그림
 
 또 다른 신화는 개가 인간에게 곡물의 씨앗을 전해주었다는 이야기이다. 쓰촨성의 티벳족 전설에 따르면 옛날에 곡물은 매우 크고 잎이 풍성했다고 한다. 따라서 사람들은 용변을 본 후 그 잎을 위생용으로 사용했는데, 이를 본 하늘의 신이 화가 나서 곡물의 씨를 모두 회수해 가려 했다. 이 때 개 한 마리가 나타나 신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울면서 간청했다. 이에 감동한 신은 곡물의 씨앗 몇 개를 남겨주었는데, 이것이 오늘날 인간의 주식인 곡물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신화는 티벳족 뿐만 아니라 부이족, 거라우족, 하니족, 수이족, 좡족 등이 믿고 있다. 한편 묘족은 원래 개는 아홉 개의 꼬리를 가지고 있었는데, 하늘에서 곡물을 훔치다가 간수에게 걸려 싸우다가 여덟 개의 꼬리를 잃었다고 한다. 그래서 하나 남은 꼬리에 씨앗 감추어 지상의 인간들에게 전해주었다는 것이다. 좡족과 거라우족은 곡물의 머리 부분이 개의 꼬리처럼 구부러져 있고 털이 많은 것은 바로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개에게 곡물을 빚지고 있으니 이 신화를 믿는 민족들은 추수를 하면 꼭 개에게 음식을 제공한다고 한다.

이 외에도 개와 관련된 신화와 전설은 많다. 손오공의 다리를 물어 이랑신이 손오공을 생포하도록 공을 세운 이랑신의 반려견 이야기도 있다. 견원지간(犬猿之間)이라는 사자성어가 여기서 생긴 것이라는 이야기도 있다. 또한 하늘의 개 천구(天拘)이야기도 있다. 하늘에 사는 검은 개 천구가 배가 고파 해와 달을 삼켜버려 일식이나 월식이 일어난다는 이야기이다. 이 때 북을 울려 개를 놀라게 해 해와 달을 뱉어내도록 해야 일식과 월식이 사라진다고 한다. 과학적 설명이 없던 시대에 일식이나 월식은 사람들에게 분명 두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이러한 두려움을 개와 연결시킨 것이다.

중국 신화에는 다양한 동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동물들은 대부분 용, 해태, 봉황과 같은 상상 속의 동물이거나 여러 동물이 결합된 기괴한 모습의 동물이다. 그런데 개는 신화 속에서 거의 대부분 현실의 온전한 동물로서 등장한다. 사실 그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가축으로서 오래 전부터 인간과 함께 살아왔기 때문에 인간이 가장 잘 아는 동물이기에 개를 상상의 동물로 그리거나 날개가 달린다거나 하는 모습으로 그릴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또 다른 특징은 다른 지역 신화 속의 개들은 대부분 이름을 가지는데 반해 중국 신화 속에 등장하는 개는 판허를 제외한다면 대부분 고유한 이름을 갖지 않는다는 것이다. 천구처럼 그저 하늘의 개라고 표현한다. 이것은 개에게 특별한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물론 앞에서 말한 소수민족의 경우는 예외이다. 사실 중국 신화에서는 그리스나 이집트와 같이 개가 사후세계로 가는 길목을 지키는 신이라거나 하는 개념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개를 신비한 동물로 묘사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중국에서 개고기 윤리학
개고기의 윤리적 문제는 오늘날의 중국에서도 논쟁거리이다. 하긴 아무리 경제가 발달하고 애견인구가 늘어도 수 천 년의 역사를 가진 개고기 섭취 문화가 한 순간에 사라지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중국에서도 개고기 섭취는 점점 줄어들고 있는 상황인 것만은 분명하다. 일부 주장에 따르면 중국인들은 개를 포유동물의 조상이라고 생각한다고 한다. 포유동물을 의미하는 거의 모든 한자에는 犬의 변형인 개사슴록변(犭)이 들어있다. 예를 들어 여우 호(狐), 이리 랑(狼), 사자 예(猊고)처럼 형태상 유사한 동물뿐만 아니라 고양이 묘(猫), 원숭이 유(猶), 돼지 저(猪)처럼 전혀 상관없는 동물들의 한자에도 개사슴록변을 쓰고 있다. 아마도 이것은 개가 최초의 가축이었기 때문에 그 이후에 알아가는 동물들의 명칭을 만드는데 개를 의미하는 개사슴록변을 붙였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대 중국에서 개는 다른 동물들과 다를 바 없는 그저 포유동물의 하나일 뿐이었을 것이라는 유추가 가능하다. 중국에서 전통적으로 이어져 내려온 개를 음식 재료의 하나로 생각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생각이 기반이 되었을 것이다. 단순히 포유동물의 하나이기 때문에 당연히 먹을 수 있는 동물이라는 것이다.

중국에서 개는 사실 어떤 상황이냐에 따라서 긍정적이기도 하고 부정적이기도 했다. 개는 신이 내려준 선물로서 존중받았지만 특정한 존재의 목적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이러한 목적의 첫째는 인간에게 음식을 제공해 인간이 생존하는데 돕는 것이고, 둘째로는 제물로서 희생되어 인간의 제례의식에 기여하는 것이다. 첫 번째 목적에서 개는 먹기 위해 기르는 동물이라는 개념을 만들어 주었다. 중국에서 개고기 섭취는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기원전 136년 국교가 된 유교도 개의 식용을 금지하지 않았다. 오히려 먹는 개와 다른 용도의 개를 구분함으로써 개고기 섭취를 정당화했다고 할 수 있다. 개고기 섭취가 유교의 윤리학과 결코 대립적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유교의 창시자 공자 역시 개를 길렀는데, 개고기 문제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대신 예기 4장에서 자신의 개가 죽었을 때 머리가 흙에 닿지 않도록 거적으로 싸서 묻으라고 하여 죽은 동물에 대한 인간의 도리만을 언급하였다. 유교의 경전 중 하나인 주례는 개를 세 가지로 분류했는데, 각각은 사냥견(tianquan-田犬), 경비견(feiquan-吠犬), 음식의 재료가 되는 개(shiquan-食犬)이다. 이러한 논리는 ‘여전히’ 개고기를 섭취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과 유사한 것이다. 주나라 시대의 또 다른 자료에 따르면 개의 역할에 따라 개를 구분해 놓았는데, 집과 재산을 지키는 개(shougou-守狗), 사냥개(liegou 獵狗), 경주용 개(zougou-走狗), 애견이나 반려동물로서의 개(xugou-畜狗) 등이 그것이다. 여기서는 식용으로서의 개에 대해서는 따고 구분해 놓지 않았다. 이는 개가 원래 먹기 위해서 기르는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연히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고대 중국의 개 모양 도자기-비상업적 용도로 재사용가능.jpg▲ 고대 중국의 개 모양 도자기
 
어쨌든 개고기는 고대 중국에서 대중적으로 소비되던 단백질 공급원이었다. 처음에는 주로 바비큐 형태로 먹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개고기는 중국어로 개고기 연(肰)인데, 태우다 혹은 굽는다는 한자는 불 화(灬) 위에 개고기 연을 올려놓은 불탈 연(然 )이기 때문이다. 후에 제사에서 사용할 탕에 개고기를 사용하면서 이른바 ‘보신탕’이 만들어진 것이다. 봉건영주들의 식탁에는 종종 개고기를 이용한 탕과 밥이 올랐다. 하지만 이렇게 개고기가 대중적이었지만 구도((狗屠)라고 부른 이른바 개백정은 신분이 매우 낮은 직업이었다. 위진남북조시대 정치가인 범엽은 그들은 게으로고 믿을 수 없는 사람들이라고 이야기했다.

개고기는 신분을 불문하고 제사 등의 행사를 하고 식사로 즐겼을 만큼 대중적이었다. 당연히 제사상에 올리는 음식으로도 사용되었다. 개의 기름으로 튀긴 물고기를 먹으면 여름에 열을 낮춰준다고 믿었다고 한다. 황제는 주로 가을에 개고기를 먹었는데, 이는 피로를 줄여준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기원전 4세기에 출판된 중국의 역사서 국어에는 춘추전국시대 월나라 왕이 징집할 인구를 늘리기 위해 남자아이를 낳는 가족에게는 두 항아리의 술과 산모에게 먹일 개 한 마리를 출산 장려금으로 주었다. 대신 여자아이를 낳은 가족에게는 두 항아리의 술과 돼지를 주었다. 이렇게 개고기 중국인들이 ‘죽고 못사는’ 돼지고기보다 고급 음식으로 취급되었던 것이다.
 
송나라 시대 귀족의 연회-public domain.jpg▲송나라 시대 귀족의 연회 /사진=public domain
 
하지만 이러한 관습은 기원후 1세기 경 불교의 도입과 4세기경 도교의 확장 이후 점차 줄어들기 시작했다. 불교는 윤회사상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당연히 살생과 육식을 금한다. 도교 역시 자연친화적인 교훈을 가지고 있다. 도교는 유교와는 달리 제례 등을 고집하기 않기 때문에 제사에서 사용되기 위한 개의 도축이 필요 없었을 것이다. 또한 도교는 윤회와 같은 사후세계관을 가지지 않았고 윤리학 역시 “자비로움慈, 검소함儉, 겸손함不敢為天下先”을 강조하기 때문에 개의 학대와 같은 문제에 단호했다고 할 수 있다. 6세기~7세기 정도에 와서는 중국에서 일부 민족을 제외하고는 상층계급에서부터 개고기 섭취는 금기시되었다. 1644년 청나라가 들어서고부터는 아예 개를 죽이거나 먹거나 개 가죽으로 옷을 만드는 일까지 금지시켰다. 이것은 청나라의 태조 누르하치와 개의 이야기에서 비롯된다. 누리하치가 명나라 군대의 추격을 받고 화살을 맞아 초원 위에 누워있을 때 명나라 군대는 초원을 불태워버렸다. 이에 개 한 마리가 주변의 호수에 뛰어들어 물을 자신의 몸에 묻혀 주변의 풀들을 적셔 누르하치가 살아남았다는 이야기이다. 이러니 어떻게 개고기를 먹을 수 있겠는가?
 

또 다른 개들의 희생
고대 중국에서 음식을 위한 개들의 희생과는 별개로 또 다른 형태의 희생도 많이 존재했다. 앞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중국인들은 개는 하늘이 인간에게 내려준 선물이라고 믿었기 때문에 개의 피를 신성하게 여겼고, 종종 맹약식 등을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다. 또한 제사를 위한 제물로 상용된 것은 물론 각종 액운을 쫓기 위한 도구로도 사용되곤 했다.
 
기원전 1600~1046년 상나라(은나라)의 수도였던 안양 주변에서 발굴된 무덤들에서는 수많은 인간의 유골과 함께 제물로 희생된 개들이 함께 발굴되었다. 거의 모든 무덤에서 개의 유골이 발굴된 것으로 보아 장례 의식에서 개의 매장이 일상적이었던 같다. 유적지에서는 825명의 사람 유골과 함께 말 10마리, 황소 10마리, 양 18마리. 개 35마리의 유골이 발견되었다. 개들은 통상 갈대 매트로 싸이거나 나전칠기 관에 묻혀 있었고, 때때로 추가 달린 작은 종이 개의 목에 매어 있었다. 목에 종이 매여 있었다는 것은 죽은 사람이 반려견으로 키우던 개였다는 것을 의미할 것이다. 이것은 아마도 세후세계를 동행하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한나라 후기 개 모양 진흙상-public domain.jpg▲ 한나라 후기 개 모양 진흙상 / 사진=public domain
 

또한 개는 질병이나 액운을 막아주는 동물로 여겨졌다. 따라서 사람들은 집을 짓거나 성곽을 축조할 때 근처에 개를 묻곤 했다. 또한 상나라 시대의 갑골에서는 태풍과 같은 강한 바람을 멈추게 하기 위해 개를 죽여 제사를 지내는 풍습도 적혀있다. 주례에서도 전염병을 쫒기 위해 개를 조각내서 성문밖에 묻거나, 귀신을 쫓기 위해 황제가 옥으로 된 마차를 타고 바퀴로 개를 밟고 지나가는 의식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다. 지방 관리들은 이 의식을 위해 얼룩이 없는 개를 공급해야 했다.

이러한 풍습은 기원전 5세기 경을 기준으로 점차 밀짚으로 만든 개 형상으로 대체되었다. 노자의 도덕경에도 나온 것으로 보아 점차 퍼져나간 도교의 영향을 받은 것일 수 있다. 중국에서는 오랫동안 집 앞에 짚으로 만든 개 모형이나 형상을 세워두곤 했는데, 이는 재난에 대비해 마당에 개 혹은 짚으로 만든 개를 묻었던 관습에서 유래한다. 어쨌든 죽은 사람과 함께 동물을 묻는 행위는 바로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기원전 200년을 전후로 점차 흙으로 만들어진 조형물로 대체되었다. 중국 북부 지역에서는 사악한 영혼을 쫓기 위해 액막이로 종이를 잘라 개 모양을 만들어 이것을 5월 5일 단오절에 강에 띄워 보내는데, 이것 또한 액막이 행사의 일환이다.  (2편에 계속)

 
글 / 이선필 정치학박사
한국외대 강사
뷰티독스일산애견학원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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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선필의 세계 애견문화 산책] 고대 중국 편 1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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